월-E는 디즈니의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칙칙하고 낯선 애니였다. 그래서 관심을 두지 않다가 애니메이션계의 명작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껴 보게 됐다.
황폐화된 지구에서 홀로남아 쓰레기를 수거하는 월E와 최첨단 탐사용 로봇 이브가 만나는 초반 부분은 인간이 아닐 뿐이지 뻔한 사랑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월E가 이브를 가져가는 탐사선에 올라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우주 항해선에 몰래 숨어드는 장면부터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텔링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브는 인간들이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낸 식물 탐지기 로봇이다. 700년이 넘도록 지구에서 생명을 찾지 못했고 그동안 인류는 대기업이 만든 우주항해선에서 모든 것을 로봇에게 전적으로 맡긴다.
사람들은 첨단화 된 유모차(?)를 평생 타고 다니다 보니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고도비만이 됐다. 애니라서 살찐 코코몽들같아 귀여웠지만 실제였으면 충격적인 비주얼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화면 안에서만 소통한다. 화면에 온통 신경이 쏠려서 밖에서 누가 아무리 고함을 쳐도 모른다. 올해 유행하는 컬러가 블루라고 하자 모든 사람이 일제히 파란 옷을 입는다.
이 영화가 개봉한 2008년이면 스마트폰이 막 나오려고 할 때쯤이었을 텐데 현대사회를 미리 예견한 듯 가상현실에 빠져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하루 종일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동영상을 보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도 저 사람들이랑 큰 차이가 있을까 싶다.(영화를 보면서 찔린 1인) 로봇의 사랑이야기 역시 감동적이었지만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인공지능에 대항하여 한 걸음 내딛는 선장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이 영화를 보고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걷는 것조차 못했던 인류가 황폐화된 지구에서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삶의 난이도가 갑자기 상승했지만 기계에서 벗어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걷고 타인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서로를 만질 수 있게 됐다.
기계에 의존한 채 생각하는 법마저 잃어버린 우주선 안에서의 생활은 육체적인 생존에 불과하다. 희망을 품고 척박한 땅에 식물을 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립(自立)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사람들은 기계가 모든 선택을 대신 해줘서 육체적으로 행복했던 생존대신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립을 원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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